■ 제1일(8월18일. 월)
출발(인천에서 비행기 타고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간다)
만남의 장소에서 참좋은 여행 인솔자 오선영님을 만나 서류를 받고 폴란드 항공 티켓 오픈을 기다리다가 패스트 트랙을 이용해 빠르게 검색대 통과, 출국심사를 하고 면세구역으로 들어가 22번 게이트에서 남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탑승한다. 패키지여행이다 보니 만날 일행에 대한 기대와 염려를 안은 채.
11시 20분 출발 예정이었으나 기술적 결합으로 지연되어 12시 조금 넘어 이륙한다. 폴란드 항공인 비행기는 생각보다 좌석이 좁지 않았고 두 번에 걸쳐 제공되는 기내식이 입맛에 맞아 그릇을 싹싹 비워낼 정도로 맛이 좋다. 컵라면, 음료, 간식거리들을 맘껏 주는 것도 지루함을 조금이라도 감소시켜 준다. 그래도 해를 따라 서쪽으로 종일 이동함은 못내 힘이 든다. 시간을 바꾸지 않은 내 시계로 오후 10시가 넘었는데도 밖은 해가 쨍하다. 오늘 하루는 시차 7시간을 더하면 31시간이다.
영화도 보고 잠도 자고 몸부림치다 보니 13시간 비행도 끝이 나고 이내 바르샤바 쇼팽공항에 도착한다. 입국심사는 비교적 빠른 편이지만 짐 찾는 데만 1시간이 걸려 Mercure 호텔에 오니 오후 7시가 다 된다. 이제야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 제2일(8월19일. 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의 시가지를 둘러보고 비아위스토크로 간다.
식사 전 호텔 주변 산책을 하면서 전철역에서 차에 오르내리기도 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면서 바르샤바의 아침과 조우 해본다.
8시 호텔 출발, 와지엔키 공원으로 가는 길은 왠지 밋밋하기도 하고 썰렁하기도 하다. 우리보다 세 배나 넓은 국토에 인구는 1,800만 명의 재외인구를 재외하고 4천만 명이라니, 인구밀도가 낮아서일까?
현지 가이드 송은주님을 만나 바르샤바 일정을 시작한다.
와지엔키 공원은 18세기 폴란드의 마지막 왕 스타니스와브 포니아토프스키가 1766년부터 30년에 걸쳐 조성한 공원이다. 일명 쇼팽공원으로도 불린다. 호수에 세워진 쇼팽의 동상은 히틀러가 동상의 머리만 두고 녹여버렸으나 폴란드 국민의 성금으로 다시 복원한 것이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니 정면에 쇼팽 동상이 보인다. 손가락, 독수리, 나무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쇼팽을 보호하듯이 만들어졌다. 이 나라 출신 중 가장 사랑받는 위인으로 공항 이름도 그의 이름을 붙여 놓았듯이 폴란드 사람들의 쇼팽 사랑은 각별한 것 같다.
가이드로부터 쇼팽의 일대기를 들으며 큰 숲길을 걷는다. 1810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쇼팽은 15세 때 자기 작품을 가지고 유럽 연주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그동안 폴란드는 전쟁에 휩싸이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어 파리에 정착한다. 파리의 예술계는 쇼팽의 음악에 매료되고 명성은 높아져 갔으나 병약했던 쇼팽은 결국 1949년 39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쇼팽이 바라보는 시선에 헝가리 출신의 음악가 리스트의 흉상도 있고, 우람한 나무들 사이로 갈색 청설모가 왔다 갔다 하고, 공작새가 길가를 자유롭게 다니는 등 평화롭기에 그지없다.
호수 너머로 와지엔키 여름궁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1660년에 건립된 것을 19세기 초반에 새롭게 단장해서 러시아 총독궁으로 사용하였고, 1989년부터 5년간은 폴란드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도시 자체가 거의 숲이었다니 비좁은 나라에서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꽃가루 알레르기로 고생이 많다 할지라도 엄청 부럽다.
공원을 나와 버스로 이동해 시가지로 들어가는 도중에 이 도시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배경과 3천 번의 외세 침입, 123년간 지도에서 사라졌던 역사, 2차대전 때 철저히 파괴됐으며 세계 3대 학살 중 하나로 인정되는 카친학살 등 이들의 아픈 역사를 노련한 가이드의 설명으로 재밌게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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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심장이 묻혔다는 성 십자가성당으로 간다. 두 개의 첨탑이 있는 성당 입구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계신 예수님의 고통을 표현한 청동상이 있다. 쇼팽은 프랑스에서 죽게되자 유해를 조국 폴란드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정치적인 문제로 고국에 안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동생이 파리를 방문해 쇼팽의 심장만을 가지고 돌아와 이 교회에 묻었다고 한다. 몸은 프랑스에 묻혀 있지만 심장은 폴란드에 묻혀 있는 슬픈 사실이다. 화려하고 장엄한 분위기의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쇼팽의 이름이 쓰인 커다란 기둥을 볼 수 있는데, 그 기둥 아래에 쇼팽의 심장이 묻혀 있다.
성당을 나와 지동설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의 좌상이 있는 과학 아카데미 건물을 지나고 1817년에 설립된 바르샤바대학 앞에서는 이 나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성 요셉 방문자교회도 지난다. 교회 앞에 스테판 비신스키 추기경의 동상이 있다. 폴란드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공로를 인정받고 있는 폴란드의 영웅이라고 한다.
대통령궁 앞에서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카잔스키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도 듣는다. 2010년 카틴 숲의 학살 70주년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통령 및 폴란드 정부 고위관계자들을 태우고 바르샤바에서 출발한 전용기가 스몰렌스크 항공기지에 착륙을 위해 진입하던 도중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폴란드 출신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아담 미츠키에비츠 동상도 지난다. 그는 폴란드의 위인으로 존경받고 있단다. 그런데 그는 바르샤바에 산 적이 없다고 한다.
구시가지로 들어선다. 아기자기하게 그리고 화사한 건물들이 밀집돼 있어 사진의 배경으로 딱 알맞은 잠코비 광장에 도착한다.
광장 중앙에는 17세기에 세워진 지그문트 3세 바사 청동상이 있다. 세계 2차대전 당시 파손되었으나 복원된 것이다. 바사 왕은 폴란드의 수도를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옮긴 인물이다.
잠코비 광장에서 가장 독보적인 건물은 바르샤바 왕궁이다. 파괴되고 복원되기를 거듭하다가 2차 세계대전 때 완전히 파괴되었다. 1971년에 남은 잔해를 이용해 완벽하게 재건되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광장을 지나 삼각형 모양의 지붕이 특징인 성 요한성당으로 들어간다. 14세기 말에 지어졌으나 2차대전 당시 파괴되었다가 복원된 것으로 바르샤바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역대 폴란드 왕들의 대관식과 결혼식이 열렸던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역사적인 인물들, 조각,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등. 볼거리가 아주 많다. 현재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구시가지 광장에서 들어가니 사면에 각각 특징을 지닌 건물들이 서있다. 이곳에서 한 시간 남짓의 자유시간이 주어져 광장 한복판으로 갔다.
바르샤바의 수호신인 인어상이 칼과 방패로 타운을 지키고 있다. 광장의 건축물들은 복원되었다지만 다양한 자료를 이용해 완벽한 재건을 해서 그런지 고풍스럽다. 하얀 천막의 카페들도 정겹다.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기념품 가게도 기웃거린다.
폴란드는 유럽연합에는 가입하였으나 유로존에는 가입을 안 하고 자국 화폐 즈워티를 고집하고 있어 쇼핑에 제한이 따른다. 다행히 트레블 웰렛 카드가 있어 이용했지만 불편했다.
다시 일행과 만나 구시가지를 나서는 성문 바르바칸을 지난다. 화약고와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1,540년 구시가지를 보호하기 위해 성문 대신 세워졌다. 방어적 가치가 미미했기에 18세기에 부분적으로 해체되었고 1944년 바르샤바 봉기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세계 2차대전 이후에 재건됐다.
구시가지를 나와 세계적인 과학자 퀴리부인 생가로 간다. 18세기에 건축된 연립주택이다. 마리 퀴리가 이 집에서 태어났으나, 여기서 겨우 1년 미만 살았을 뿐이다. 1934년 퀴리가 사망하자 이 집에 그녀의 명판을 붙었다. 비록 독일군에 의해 철거되었지만, 명판은 살아남았고 세계 2차 대전 이후 집이 재건되었다. 이후 여러 번 보수를 거쳐 현재는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기둥에 저울 모양이 조각되어 있는 대법원을 지나 주차장으로 간다. 오전 투어를 마치고 현지 가이드와 헤어지면서 모든 분야에 능통하고 알기 쉽게 설명을 들려줬던 가이드에게 고마움과 찬사를 보내본다.
강남 19식당에서 김치찌개로 점심을 먹다 보니 소나기가 내린다. 투어 중에 참았던 모양이다. 퍽 다행으로 여기며 버스를 타고 바르샤바와 안녕을 고하며 비아위스토크로 이동한다.
비는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데 도로 양옆에는 숲들의 행진이다. 그중 늘씬하고 기다랗게 하늘로 치솟은 붉은 줄기의 소나무 숲이 퍽 인상적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평지라는 게 실감이 난다. 어느 쪽을 보아도 산이 안 보인다. 외부 침략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는 말이 수긍이 간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며 가이드가 들려주는 쇼팽의 연주곡, 녹턴, 친구들과 헤어지는 이별곡 등을 감상한다.
휴게소에 들렸다가 이름조차 발음이 어려운 비아위스토크란 소도시에 도착하여 먼저 Mercure 호텔 체크인하고 저녁 식당으로 간다. 오는 길에 대형마트에 들려 눈요기만 하고 숙소로 돌아와 두 번째 날을 마무리한다.
■ 제3일(8월20일. 수)
비아위스토크 시내를 둘러보고 국경을 넘어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로 간다.
호텔식 아침을 먹고 여유롭게 호텔 한 바퀴를 도는데 완연한 가을 날씨이다. 바람결이 쌀랑하다. 한국은 아직도 무더위가 가시질 않았다는데 우린 피서온 셈이다. 느지막하게 호텔을 출발, 한적한 도시로 들어가는데 건물들은 육중한 유럽풍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폴란드 자체가 그랬듯이 국경 지역인 이곳도 침략의 발판이 되어 처참한 역사를 지녔지만, 지금은 평온하기에 그지없어 보인다.
첫 번째 방문지는 성 로코 성당이다. 언덕 위에 있는 흰색의 성당이 비아위스토크 도시 경관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한다. 치유의 은사로 성인의 반열에 오른 로코 성인을 기리는 성당으로 80m가 넘는 첨탑 꼭대기에 성모님이 계시는데 너무 높아 실루엣으로만 보인다.
성당을 둘러본 후 구시가지로 걸어본다. 다양한 색채와 섬세한 터치로 그려진 벽화들을 감상하고
피노키오의 소풍이라는 작품 바퀴 앞에서 폼을 잡아보기도 한다. 성 니콜라스정교회를 지나니 조그마한 동상이 있다. 국제어 에스페란토의 창안자 자멘호프라고 한다. 비아위스토크는 그가 태어나 소년기를 보낸 곳이란다.
비아위스토크를 알파벳으로 만들어 놓은 조형물에서 사진을 찍고 파리의 루브르궁을 모방했다는 브라니카 궁전에 들어간다.
넓게 펼쳐진 후기 바로크 양식의 브라니카 궁전은 폴란드의 왕이 되기를 열망했던 군 지휘관, 얀 클레멘스 브라니카가 18세기에 지었다. 궁정 뒤편에 펼쳐진 정원은 온갖 나무들과 화초, 그리고 조각상들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정원을 벗어나 길 건너에 있는 성모승천 성당으로 갔다. 뾰족한 아치와 날카로운 선들, 높은 첨탑,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섬세한 조각 장식이 있다. 1900년대 초반에 브라니츠키 가문의 후원으로 건립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큰 피해를 보았지만, 복원작업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되찾았다. 오늘날 비아위스토크의 역사와 문화적 유산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웅장한 내부도 보고 길거리 벤치에 앉아 여유를 즐기다가 10등신의 멋진 젊은 신부를 따라 성당 건물을 한바퀴 돌아보기도 하며 오전을 보낸다.
점심 식사 장소로 이동하고 다시 차를 만나려고 거리를 지나는 것 자체가 관광이다. 다시 오지 못할 이 소도시를 조금이라도 눈에 더 넣어보려고 이곳저곳에 시선을 보내며 폴란드를 떠난다.
리투아니아 빌뉴스를 향해 북으로 달리는 차량은 낯선 풍경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끝도 없이 펼쳐진 숲들. 이름도 어려운 비아워비애자숲이라고. 붉은 줄기를 가지런히 깔끔히 단장하고 하늘 높이 솟아있는 소나무들 그 사이사이로 허연 자태를 고급지게 뽐내며 미끈하게 서있는 자작나무가 숨바꼭질하듯 나타나기도 한다. 숲이 길에서 멀어질 때면 지평선을 가늠하기조차 어렵게 넓은 초원이 등장한다. 밭작물을 거둬들인 건지는 몰라도 메밀밭 한두 번 보이고는 그냥 텅 비어있다.
비아위스토크를 떠난 지 2시간 25분 만에 국경에 도착, 셍겐조약 덕분으로 검색 없이 우정의 다리를 건너 통과한다. 리투아니아로 들어서는데 국기 하나만 덜렁 서있을 뿐이다. 라투아니아는 폴란드보다 1시간이 빨라 손목시계를 1시간 뒤로 돌려놓는다.
그런데 풍경은 조금 다르다. 그 미끈한 소나무가 더는 미끈하지 않고 가지치기가 거의 안 돼있어 다름을 실감한다. 더러 소 떼가 정겨운 목장도, 2~3층의 단아하고 깔끔한 집들도 폴란드보다도 훨씬 자주 나타난다. 그래도 멀리 보이는 푸른 것들은 산이 아니고 숲이라는 것, 산이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활엽수 나무들은 벌써 노랗게 물들어 가을 분위기를 연출한다.
발트 3국은 1991년 9월 소비에트 연방해체 과정에서 독립하였으며, 현재는 자본주의로 전환하였다. 2004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EU)에 신규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리투아니아는 발트 3국 가운데 가장 영토가 넓고, 국기는 삼색기의 형식으로 황색은 태양과 번영을, 녹색은 자유와 희망을, 그리고 적색은 리투아니아를 위해 희생한 이의 용기와 피를 상징한다고 한다. 면적은 한반도의 1/3정도, 인구는 290만 명 정도이다.
휴게소도 들리고 5시간 정도 달려 빌뉴스에 도착하여 시내로 들어서니 사람도 트램도 오가며 활기를 띤다. 저녁 식사 전 시간이 있어 시내 공원으로 들어갔다.
리투아니아 국가를 작곡한 반카스 쿠디동상이 우릴 반긴다. 잠깐이나마 공원에 있어 보니 사람 냄새가 나는 정겨운 첫인상을 주는 곳이다.
저녁은 시원한 생맥주 한 잔으로 느끼한 요리를 맛있는 안주로 변신시키는 마법을 경험하면서 유쾌하게 먹고 식당을 나와 Marriott 호텔로 간다.
내일 아침은 이곳의 어떤 모습을 찾아볼지 기대하면서 오늘도 마무리한다.
■ 제4일(8월21일. 목)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의 구시가지를 둘러보고 호수 위의 트라카이성을 방문하고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로 간다.
날씨가 시원하기는 해도 그리 쾌청하지는 않다. 이곳에 온 지 32년 되었다는 선교사 강성은 가이드를 만나 빌뉴스의 탄생 신화를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첫 방문지는 구시가지의 관문인 새벽의 문이다. 16세기에 르네상스 건축양식에 따라 지어진 새벽의 문은 시내를 감싸고 있던 성벽의 출입문 중의 하나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문이다. 새벽의 문 안으로 들어와 뒤를 보면 2층에 작은 예배당이 있다. 화려하게 장식된 성모 마리아의 얼굴과 손이 검게 채색되어 있다. 1993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방문하여 더욱 유명하단다.
새벽의 문을 지나면 바로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테레사 성당을 볼 수 있다. 내부가 아름답다고 했지만 9시가 안 되어 들어가지 못하고 성령교회로 간다.
바로크 양식의 성령교회 입구에 순교한 세 분 성인 벽화와 교회 안에 순교한 성인 세 분의 미라가 안치돼 있고 제단이 청록색으로 화려했고 여태껏 봐왔던 제단의 장식과는 많이 달랐다.
고딕양식과 바로크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삼위일체 성당과 국립 필하모니를 지나 리투아니아의 독립과 건국에 많은 공로를 세운 요나스 바사나비치우스 동상을 만난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성 카지미르 성당으로 간다, 성 카지미르 성당은 1618년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다가 1920년 복원되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과 폴란드 왕 카시미르의 아들 카르시르에게 헌정된 성당이다.
조금 더 걷다 보면 빌뉴스의 시청이다. 건물이 처음 들어선 것은 15세기이다, 지금의 구시청사 건물은 18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워졌다. 6개의 도리아식 기둥과 그 위의 삼각형 모양이 돋보인다. 19세기 초에 극장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사용되었다. 지금은 특별 전시 열람 공간으로 사용된다. 그 앞으로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다.
시청사 광장을 벗어나면 건물 정면에 ‘SIGNATARU NAMAVI’라고 적힌 건물은 1919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할 때 2층 발코니에서 서명했기에 서명의 집으로 불리며 국기는 1년 내내 걸려있으며, 지금은 독립선언 박물관이라고 한다.
정신없이 설명하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가이드를 따라 사진 찍을 시간조차 없이 막 다닌다. 뒤돌아 생각하니 뭘 봤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날 정도이다.
어디에 카메라를 들이대도 멋진 길을 지나 그네가 매달려 있는 다리를 지나 우주피스에 들어선다.
우주피스 공화국은 만우절인 4월 1일, 우주피스 지역이 하루 동안 독립공화국을 선포하는 만우절 축젯날이다. 한국 방송에도 방영되어 소개된 적이 있다.
우주피스라는 이름은 ‘강 넘어’라는 뜻이다. 원래 빌뉴스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이었으며 1990년대부터 젊은 예술가들이 저렴한 방세로 모이기 시작했고 창의적인 발상들이 어우러져 1997년부터 4월1일 하루 동안 우주피스 공화국을 선포했다고 한다.
우즈피스 공화국을 나타내는 표지판과 강가 축대 틈의 인어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안으로 들어가니 희한한 그림들과 조형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2002년에 세웠다는 높이 8.5m의 나팔부는 천사상을 지나 길을 따라가면 헌법 기념물을 만난다. 우주피스의 상징인 구멍 뚫린 손바닥 옆으로 우주피스 공화국의 헌법이 35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동판으로 제작되어 벽에 붙어 있다. 우리말 헌법도 있어 읽어보고 사진을 찍어본다. 건물은 하나같이 낡았지만, 분위기를 깨지 않는 선에서 잘 고친 것도 많다. 티벳광장도 나온다. 달라이 라마 방문으로 만든 티벳탑은 눈 하나가 무섭게 그려있고 그 아랫단에 설산을 수행하는 스님이 그려져 있다. 마을 자체의 볼거리는 없었지만, 우주피스 공화국의 이야기는 결국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그렇게 원했던 끝없는 자유의 의지로 이해되었다.
다시 다리를 건너 성 안나성당으로 간다. 성 안나성당은 빌뉴스의 성당중 외관으로만 따지자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1501년에 지어진 건물로 적벽돌을 활용하여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어 고딕양식의 진수를 보여준다. 뾰족 솟은 탑으로 지붕 전체가 덮여 있다.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은 1812년 이곳을 지나가다가 파리로 가져가고 싶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아름다움에 반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국기와 나란히 자국 국기를 게양한 대통령궁, 거기는 경비 한 명 없는 것이 이색적이다. 그만큼 국민과 격의 없는 거겠지.
리투아니아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빌뉴스의 대성당을 지난다. 빌뉴스 대성당은 이전에 이교도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 있던 자리에 1387년부터 지어진 성당으로 15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역사가 오래된 성당들이 공통으로 겪는 운명이지만, 대성당 역시 매 세기마다 부서지고 보수하기를 계속해 왔다.
대성당 광장은 19세기 말 성당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1989년 8월 23일 빌뉴스, 리가, 탈린을 잇는 인간사슬 ‘발트의 길(Baltic way)’ 시작점이기도 하고 마지막 점이기도 하다. 이 시작점을 광장 바닥에 발바닥 모양의 부조로 새겨놓았는데, 사진에는 남기지 못해 아쉽다.
발트 3국 국민 200만 명이 손에 손을 잡고 세계에서 가장 긴 620km의 인간 사슬을 만들어 라디오에 맞추어 15분 동안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이 평화적 시위는 소련의 50년 지배에서 벗어나 1991년 신생 독립국으로 재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성당 왼쪽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종탑, 그리고 대성당 앞에 리투아니아의 수도를 트라카이로부터 빌뉴스로 옮긴 게디미나스의 동상이 있다.
빌뉴스대학교로 발걸음을 옮긴다. 빌뉴스대학의 성 요한성당은 1387년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고 1571년 대학의 일부가 되었다. 종탑에 경로 3유로 입장료를 내고 오른다. 빌뉴스의 구시가지를 전망하기에 좋은 곳이다. 시가지 전경이 보이는데 붉은 건물들이 주변 녹색 숲과 어우러져 아름답다. 또 다른 방향에서는 게디미나스 언덕도 보이고 더 멀리 성 십자가 언덕도 보인다. 거기다 시원한 바람조차 불어주니 내려오기가 아쉽다.
고풍스러운 도서관 문을 지나 천장화가 유명하다는 구내매점으로 들어간다. 1979년 대학설립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벽과 천정에 화려한 프레스코화로 장식하였고 한다.
드디어 자유시간, 한숨 돌리고 대학교 내 식탁까지 있는 벤치에서 준비한 주먹밥과 컵라면으로 훌륭한 한 끼를 해결하고 다시 시가지로 나선다.
상가도 기웃거리고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급히 다니느라 놓친 거리를 다시 보고 대성당 안에도 들어가 보고 많은 인파들 속에 묻혀 본다. 빌뉴스에만도 성당이 60여 개라 하니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성당이다. 작지만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빌뉴스를 떠나기가 아쉽지만, 새로운 가이드 김은옥님을 만나 트라카이로 출발한다.
트라카이로 가는 동안 가이드로부터 리투아니아의 역사 등 여러 가지를 설명을 듣는다. 한반도의 2/3 국토에 인구는 290만도 안되는 나라인데 IT 강국으로 3만 불 국민소득의 나라이다. 레이저 기술력이 세계적이라는 설명에 놀라웠다. 70% 이상을 수출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병원에서도 수입하고 있단다. 여름방학은 3개월, 겨울방학은 2주 정도라니 아마도 날씨를 고려한 듯하다.
또다시 비가 내린다.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해 봤자 290m밖에 안 된다는 게 실감이 난다. 잠깐을 달리는데도 숲과 초원 이따금 주택들이 보일 뿐이다. 호수와 섬으로 구성된 도시 트라카이는 한때 리투아니아의 수도였지만, 현재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다.
트라카이에 도착하니 호수 안에 붉은 성이 멋있어 보인다. 50유로의 별도의 요금을 내고 네 대의 요트에 나눠 타고 호수를 유람한다. 돛의 방향을 바꿔가며 30여 분 동안 성 가까이 멀리 강바람을 맞으며 담소를 나누다가 성 앞에 내린다.
‘트라카이 성’은 갈베호수 안에 있는 20개 섬 중 2개의 섬 위에 있어 물로 둘러싸인 유일한 성이다. 14세기 무렵 고딕양식으로 건축되었다가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파괴된 것을 195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성 내부는 역사박물관이라는데 들어가지는 않고 성안 넓은 광장만 보고 성 주위 한바퀴 산책하고 나무다리를 건너 나온다.
비가 올 듯 말 듯하더니만 카우나스 가는 길에 소나기도 내린다. 우리가 비를 피해 다니는 건지 비가 우리를 피해 다니는 것인지 하여간에 다행이다. 카우나스에 도착하니 해가 쨍하다.
카우나스는 빌뉴스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중세부터 중요한 역사적 중심지이다. 1030년 요새로 건설되었고, 1317년 시가 되었다.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 때 러시아에 넘겨졌고, 1812년 나폴레옹에게 폐허가 되었다가 재건되었다. 한때 4년간 리투아니아의 임시수도로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카우나스 성은 1030년에 빌뉴스의 성터에 최초로 방어 요새가 만들어지면서 지어지게 된 것으로 그 후 14세기 고딕 양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현재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계속되는 침략과 전쟁을 겪으며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하였다. 흰 구름과 파란 하늘과 붉은 카우나스 성이 잘 어울려 사진으로 실컷 남겨본다.
성 주변으로 조성된 공원에 긴 수염을 늘어뜨린 천둥의 신 페르크니스의 석상이 있어 사진으로 담고 걷다 보니
두 개의 첨탑과 핑크빛이 특징적인 성 프란체스코 교회가 나온다. 1666년부터 1720년까지 건축된 후기 바로크 양식의 교회이다.
바로 옆 광장에 하얀 건물인 구시청사는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1542년에는 성당이었고 이후 감옥 등으로 기능이 바뀌었다가 18세기 말에 개조되었다. 시청사 광장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페르쿠나스의 집’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이 있다. 페르쿠나스의 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세기에 건물 보수공사 도중에 리투아니아의 전통신인 페르쿠나스(천둥의 신)의 석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페르쿠나스의 집은 빌뉴스의 안나성당과 함께 리투아니아에서 아름답고 보전 상태가 양호한 고딕건물로서 리투아니아의 중세 건축양식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건물이라고 설명한다. 처음에는 길드 연합회 건물로, 그 후 예배당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현재는 폴란드의 민족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붉은색의 첨탑이 눈에 띄고, 첨탑 위로 자그마한 십자가가 보이는데 카우나스 대성당이다. 1408년에 처음으로 축조되었고 17세기까지는 리투아니아에서 제일 큰 건물이었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가니 금빛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중앙 제단과 중앙 제단 뒤쪽의 기둥과 조각상, 성당 후면의 파이프 오르간이 이채롭다. 성당의 외부 벽에는 19세기 말 바로 이 성당에서 주교로 일하며 리투아니아 민족의식 부흥에 중심적인 위치에 서 있었던 신부이자 시인인 마이로니스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걷다 보니 비티스 기사상이 있다. 리투아니아 국장에 등장하는 기사 상으로 검과 방패를 든 기사를 묘사한다. 비티스는 ‘추격자’란 뜻이란다. 네무나스 강가로 발걸음을 옮긴다.
국경의 다리로 불리는 비타우타스 대교를 만난다. 이 다리를 건너는 데 13일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260m도 안 되는 다리를 건너는 데 13일이나 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무나스 강을 사이에 두고 카우나스 구시가와 알렉사타 지역을 지배하는 세력이 사용하는 달력이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 리투아니아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여전히 율리우스력을 사용했고,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는 그레고리력을 사용하였다.
‘KAUNAS’라는 커다란 영문자가 있는 조형물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고 자유시간을 가진다. 구시가지로 이어지는 중심도로의 이름이 수도의 이름을 딴 ‘빌뉴스 거리’이다. 돌을 깔아놓은 길이 걷기에 매끄럽지는 않다. 고풍스럽고 아기자기한 건물이 들어서 있는 빌뉴스 거리를 배회하다가 중국 식당으로 가서 현지식보다는 나은 저녁을 먹고 Best Baltic 호텔로 가는데 비가 내린다. 오늘도 다행히 비를 피해 다녔다. 호텔이 자유로에 위치하여 성 미카엘 성당 등 이곳저곳 볼거리가 많다고 했는데 비가 와서 나갈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 제5일(8월22일. 금)
리투아니아의 샤울레이 십자가 언덕에 들렸다가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의 룬달레 궁을 둘러보고 수도인 리가로 이동하여 시가지를 돌아본다.
밤새 내리던 비는 조금씩 보이는 푸른 하늘에 밀리는 듯하면서 약간 추운 날씨다. 식사 전에 호텔 주변을 돌아보니 섬뜩한 벽화들이 있어 이곳이 ‘자유로’임을 실감한다. 멀리 미카엘 성당도 보이나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자유로 산책은 생략한다.
호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출발한다. 버스 안 온도는 13도로 나온다. 여긴 완연한 가을이다. 사울레이 십자가 언덕을 향하면서 시작으로 오늘을 일정 시작한다.
두어 시간 달려 도착하니 멀리 작은 언덕이 보인다. ‘십자가의 언덕’이라 불리며 리투아니아 국민의 무언의 저항을 보여주였다는 언덕이다. 1831년부터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언덕 위에 십자가를 꽂았는데 수없이 많은 십자가가 언덕을 뒤덮기 시작했고 소련 당국은 이를 제지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십자가의 숫자는 늘어가기만 했다. 가까이 가보니 수많은 크고 작은 십자가가 덮여 숲을 이루고 있다. 기도하기 위해, 추모하기 위해 무언가 간절함이 십자가에 배어 있는지 엄숙해지는 공간이다. 샛길 사이로 계단 양옆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모습도 다양한 십자가들이 서 있다. 하느님이 이 십자가를 통한 바람들을 기억해 주시라고 기도도 해본다.
이제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로 이동한다. 버스는 국경을 넘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달리니 국경이 애매해 넘었는지 안 넘었는지 인식하기도 어렵다. 그래도 풍경이 제법 다르다. 꽃밭과 텃밭이 있는 가정집이 보이고 지평선이 끝도 없긴 마찬가지지만 농사짓는 표가 나기도 하는 듯 사람 냄새가 난다.
라트비아는 동서를 잇는 정치, 경제 문화의 교차로였다. 그 때문에 인근 강대국들로부터 수많은 침략과 억압을 받은 아픔을 간직한 나라이다. 13세기에는 독일 십자군, 16세기에는 폴란드, 18세기에는 스웨덴과 러시아 등에 침략당했다. 1차 대전 후 독립했으나 1940년 8월 소련이 라트비아를 강제 합병했다. 이후 1991년에 독립한 라트비아는 빠르게 경제성장을 하고 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룬달래 궁전은 초원 깊숙이 엉뚱한 곳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룬달레 궁은 1735년 쿠를란트 공국을 다스리던 7대 군주 비론 공작이 여름 궁전으로 지었다. 비론 공작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을 설계한 이탈리아 건축가?를 불러와 맡겼다.? 공작이 실세에서 물러난 후 한동안 비어있었으나 1760년대에 바톨로메오 라스트렐리가 다시 돌아와 실내 장식을 마무리했다.
궁전 1층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2층으로 올라 각 방을 돌아보는데 경계하는 줄에 뭐라도 닿으면 찌지직 소리가 나는 게 인상적이다.
제일 먼저 황금의 방을 만난다. 외국 사신 알현장이자 즉위식장이다. ?비론 공작이 아들 페터에게 즉위식으로는 한 번만 썼다고 한다. 아들 페터 때 러시아에 합병돼 쿠를란트 공국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비론 대공을 신격화한 황금 방의 천장화, 벽 천장 커튼까지 순백인 화이트홀, 도자기 진열실 등 화려하다. 버스 속에서 들은 쿠를란드 공국의 막장 드라마 속 인물들이 보인다. 백색 방 장미 방 화장실이 붙은 침실 등 여러 개의 방을 돌아보는데 웅장해서 가구 같은 패치카가 기억될 것 같다. ?비론의 궁전이었던 룬달레궁은 세월이 지나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넘어가게 되고 예카테리나여제는 이 궁전을 자신이 사랑한 주보프에게 선물로 주었다.
룬달레 궁을 나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로 향한다. 리가는 1201년 독일 브레멘의 주교였던 알베르트가 건설하였으며 1282년에는 한자동맹 가맹 도시가 되어 발트해 연안의 상업 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1621년 스웨덴이 도시를 점령하여 요새화하였고 1721년 이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으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18년 라트비아의 첫 번째 독립과 함께 수도가 되었다. 이후 라트비아는 소련에 병합되어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소련 해체 후 1991년 라트비아와의 두 번째 독립과 함께 다시 수도가 되었다. 구시가지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역사가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이다.
리가에 도착하니 다우가바강이 도시 옆을 흐르고 제법 현대식 건물들이 보여 모처럼 도시다운 도시를 만난 것 같다. 강 건너 멀리 보이는 삼각형 모양의 국립도서관이라는 건물이 이색적이다.
유학 중이라는 원재희 가이드를 만나 구시가지에 들어서니 넓은 광장이 있고 붉은 대리석으로 만든 3명의 소총수상이 서 있다. 1915~1917년 빌트를 점령 통치하던 러시아가 독일에 대항해 라트비아인으로 조직한 4만 보병부대를 ‘소총수들’이라고 부른다. 그 뒤로 네모반듯한 추모벽 옆에 점령박물관이 있어 이 나라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국기조차 세 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핏빛인 검붉은 바탕에 가운데 시체를 덮은 것을 상징하는 하얀 줄이 있어 이조차 아픔을 영원히 잊지 말자는 다짐이란다.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검은머리 전당은 1334년에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상인조합인 검은머리 길드의 회원들이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의 화려한 건물은 1713년에 건물을 사들여 역사가 족히 600년은 넘는다. 아프리카 흑인 무어인인 성 모리셔스를 그들의 수호신으로 삼아서 ‘검은머리’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입구에는 흑인 상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2차 대전 때 독일의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1999년 재건되어 건물 위에 1334년과 1999년이라고 쓰여 있다.
광장 가운데에는 중세 무역상들의 수호신이었다는 롤랑의 석상도 높이 서있고 그 앞에서 플롯을 연주하는 음악가도 있다. 검은머리 전당 앞에 리가 시청사가 있다. 1334년 처음 건축하였고 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으나 1960년에 복원하였다.
다시 골목을 돌아서니 첨탑이 우뚝 솟은 성 피터(베드로) 성당이 보인다. 높이 123m의 성 피터성당은 1209년 설립된 당시에 발트 3국 중 가장 높은 탑이었는데 처음 만들어진 목재 탑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해오다가 1941년 복원작업으로 현재 모습인 메탈 탑으로 자리 잡았다.
바로 옆으로 성 요한교회가 있다.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이 기묘하게 결합한 형태로써 리가의 중세 교회 건축물의 뛰어난 기념물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성 베드로성당 뒤편에는 그림 형제의 동화 속 주인공인 당나귀와 개, 고양이, 수탉으로 구성된 ‘브레멘 음악대’가 있다. 관광객들의 숱한 손길로 콧잔등이 반질반질하다. 1990년에 리가와 자매 도시인 독일 브레멘시가 기증했다.
제법 사람들이 많아 관광지다운 거리를 지나다 보니 고양이가 지붕 꼭대기에 조형물로 앉아있는 고양이 건물도 보인다. 당시 독일계가 장악하고 있던 길드에 가입하려던 라트비아계 상인은 번번이 거절당했고 화가 난 그는 길 건너편에 저택을 짓고 원뿔형 지붕 꼭대기에 고양이 동상을 만들어 엉덩이를 길드 쪽으로 내밀게 하였고 엉덩이를 다른 쪽으로 치워달라는 길드 회원들과 오랜 법정 투쟁을 벌였다가 화해가 이뤄졌고 집주인은 길드 회원이 됐다. 고양이의 방향을 틀어 길드 쪽을 바라보게 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화제의 집이 되었다. 결국은 중세 독일의 부유 상인과 라트비아의 소상인과의 갈등의 산물이다.
고양이 하우스에서 조금 걷다 보면 리가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자유 기념비를 만난다. 높이 42m로 꼭대기에는 세 개의 금박 별을 손에 들고 있는 9m 높이의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져 있다. 라트비아의 독립전쟁 중에 희생당한 군인들을 기념하고 있다. 라트비아의 자유, 독립, 주권의 중요한 상징으로써 1935년에 제막되었다. 자유 기념비 앞 광장에도 ‘발트의 길’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는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는 사람이 우선이라고 큰길을 막 건넌다. 심지어 트램조차도 그렇다고 한다. 길을 건너니 다우가바강 지류인 시내가 흐르는 공원이다. 유람선도 지나고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 참 여유롭다. 거기에 살랑거리는 바람조차 우리를 가을로 데려다 놓아 왠지 들뜨게 한다.
잠깐 머무르다 나오니 노란색 벽면에 각종 문양이 그려진 건물이 있다. 야곱의 막사로 불리는 이 건물은 과거 스웨덴 병사들이 막사로 이용한 곳이다. 벽면의 그림은 라트비아의 독립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그려진 도시 지역을 상징하는 문장이다.
야곱의 막사 건너편의 성벽을 걷다 보니 원통형 붉은색 건물이 나온다. 화약탑이라 불린다. 성곽의 일부였던 것을 화약탑으로 사용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전쟁박물관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화약 탑을 지나 스웨덴 문에 도착한다. 스웨덴 병사들이 구시가지와 막사를 오가던 통로였다. 아치형의 문 중앙에 스웨덴을 상징하는 사자 부조상이 있다. 문 양옆에는 더 이상 전쟁이 필요 없다는 의미로 대포가 거꾸로 세워있다.
지붕이 초록인 야고보 성당도 지나고 국회의사당을 지나 삼형제 건물이 초라하지만, 고풍스러운 역사를 자랑하듯 나타난다. 닮은 듯 닮지 않은 건물 세 채가 옹기종기 붙어 있는데 15세기, 16세기, 17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들은 세기를 뛰어넘은 연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게 자리한 덕에 유명세를 얻었다.
리가성을 지난다. 리가성은 1340년 리보니아 기사단 사령관의 관저로 건설된 곳이었으나 이후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 등 라트비아를 지배한 국가의 지역사령부 건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라트비아 대통령 관저와 집무실로 활용하고 있다.
리가 성을 지나 규모가 발트 3국 중 가장 크다는 돔 성당으로 간다. 돔성당은 1201년 독일인 알베르트 대주교가 리가 건설을 시작했을 당시부터 대주교 관저와 대성당으로 사용되었다. 초기 고딕양식의 기반 위에 바로크양식의 첨탑을 중심으로 바실리카양식이 혼합된 웅장한 모습인 돔 성당은 수 세기에 걸쳐 여러 번 파괴되고 재건되어 현재는 여러 건축양식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가장 오래된 제단은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의 건물은 고딕 양식, 18세기에 지어진 첨탑은 바로크 양식이다. 돔의 첨탑은 1547년에 세워졌는데 당시 리가에서 가장 높은 첨탑이었고 높이는 140m나 됐다. 1776년의 재건축으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고 높이는 90m로 낮아졌다.
여러 색깔과 모양으로 만들어진 휴식 공간이 있고 땅바닥에 유네스코 마크도 있는 또 다른 광장을 지나는데 맥주 마시는 수레도 보이고 찻집인지 술집들이 많은 거리를 지나 검은머리 전당으로 되돌아온다.
자유시간을 주어 기념품도 사고 약술이라는 블랙발잠 술도 사고 성악가의 버스킹도 즐기는데 바리톤의 음색이 듣기 좋아 자리를 뜨기가 아쉽다. 여유롭게 시간을 좀 더 보낸 뒤 저녁을 먹고 별이 네 개 반인 Islande Hotel로 들어온다.
8시 반에 호텔 10층 루프탑에 올라가니 백야현상인지 그때야 노을이 번지고 있다. 북위 50도가 넘는 것이 실감이 난다. 반대편에는 시가지가 한눈에 조망되어 맥주 한 잔 기울이면서 야경도 함께 즐기며 리가의 하룻밤을 보내본다.
■ 제6일(8월23일. 토)
리투아니아의 시굴라에 들렸다가 국경을 넘어 에스토니아의 타르투를 둘러보고 수도인 탈린으로 간다.
식당에 내려와 보니 길게 줄을 서고 있다. 우리보다 빨리 출발하는 단체관광객들 덕분에 정신없이 아침을 먹고 싸늘한 아침 공기를 뚫고 53km 떨어진 곳에 있는 시굴다를 향하여 출발한다.
인솔 가이드는 ‘빅토르 최’에 관한 이야기와 그의 노래를 들려준다. 고려인 3세인 ‘빅토르 최’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음악을 통해 개혁을 이끌여 우상으로 떠올랐고 인기 절정에 있던 1990년 순회 공연차 들른 리가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28세로 요절했다. 정확한 사망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타살설이 제기되고 있단다. 사회의 탄압 속에서 반정부 메시지를 전해준 밴드였기에 의문은 더했다고 한다.
멋진 소나무 숲이 끝도 없이 양쪽에 뻗어있는데 소나무가 굵어졌다. 1시간 정도를 가다 도착한 곳은 시굴다 지역 투라이다 성이다. 버스에서 내려 투라이다 성까지 가는 길은 우람한 나무들과 잘 가꿔진 잔디들, 성까지 가는 길은 산책하기 좋은 공원이다.
투라이다성은 1214년 리브족 전통의 목재로 지었으나, 후에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에 의해 차례로 점령된 이후 방화로 1776년 성 전체가 파괴되었다가 20세기 중반에 복원작업이 시작되었고 처음과는 달리 붉은 벽돌을 사용했다. 망루에 올랐다. 당시에는 감시와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지었지만, 지금은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나무로 만든 계단을 오르다 보면 5층 꼭대기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경은 아름답다. 가우야 국립공원 한가운데 있는 곳이라 사방으로 모두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성 전체는 물론 강이 흐르는 숲이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걸어 나오다 보니 멋진 석조물들이 군데군데 놓여있고 사과나무와 그 밑에 떨어져 사과 무더기들도 많다. 하루 종일 걸어보고 싶은 공원이다.
버스로 5분 거리에 있는 구트마니스 동굴에 도착하니 비가 내린다. 우리네 뒷산 한 자락에 있을 법한 비 피할 정도의 구멍이다. 인솔자가 기대하지 말라고 말 안 했다면 실망이 컸을 것 같다. 동굴의 크기는 높아 봐야 5m밖에 안 된다. 산이 없고 평야가 계속되는 지역이다보니 동굴이 발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 ‘사랑의 동굴’에는 17세기 스웨덴 점령 시절 사랑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여인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면서 유명해졌다. 그 때문에 동굴 벽에는 연인의 이름과 사랑의 맹세를 새긴 흔적이 가득했다. 이 중에는 17세기에 새겨진 것도 있다고 한다.
잠시 이동해 찾아간 캣 하우스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한다. 여기저기 고양이 그림이 많다. 인구 2만도 안되는 조그만 이곳에 식당과 호텔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시굴다를 끝으로 라트비아의 일정을 마치고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 타르투를 향하여 출발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노래 ‘백만 송이 장미’는 라트비아의 국민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의 곡을 번안한 것이다. 원래 제목은 ‘마라가 준 인생’으로 마라는 라트비아 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여신이다. 이 노래는 마라에 대한 전설을 바탕으로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는 라트비아의 현실을 노래한 곡이다.
가이드가 들려주는 백만 송이 장미를 여러 버전으로 감상하며 창밖을 본다. 숲은 여전한데 소나무보다 자작나무들이 훨씬 많다. 그만큼 북쪽으로 많이 올라왔나 보다. 허연 자태를 드러내고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니 멋지기 그지없다. 저기에 눈이라도 쌓였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생각들 하면서 무료함을 달래본다.
여기 국경은 그래도 무슨 건물이라도 있어 표시가 난다. 달리면서 휙 지나가기는 했지만, 핸드폰에 여지없이 문자들이 들어온다.
3국 중 제일 잘 산다는데 달라 보이는 것은 모르겠다. 국경을 지나 한참을 가다 도착한 곳은 교육의 도시라는 타르투이다. 도착하니 비는 그치고 날씨가 쾌적하다.
타르투는 에스토니아 수도인 탈린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인 타르투대학교의 본거지이기 때문에 에스토니아의 지적 중심지로 간주된다.
도착하여 에스토니아에서는 유명한 단편소설 작가 오스카 루츠의 흉상을 만난다.
타르투 시청은 18세기 말에 지어진 건물로,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혼합되었고 시청은 현재도 공식 시청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광장 한가운데 우산을 쓰고 ‘키스하는 학생’ 동상이 있다. 1998년 제막되어 대학 도시라는 강한 인상을 남겨주는 이 동상은 주변의 분수와 어우러져 도시의 분위기를 젊고 로맨틱하게 연출한다. 광장 끝에는 1793년에 지어진 현대 미술관 건물이 있는데 지반이 약하여 피사의 사탑처럼 조금씩 기울고 있다고 한다.
시청사 광장을 나와 토메매기 언덕을 올랐다. 계단 바로 위에 니콜라이 피로고프 흉상이 있다. 러시아 출신으로 타르투 의과대학에서 5년간 근무한 인물로 다양한 외과 기술을 창안하고 기술을 개발했다고 한다.
조금 걸으니 타르투대학 본관을 그린 벽화가 있다. 대학생들이 그렸다고 한다. 건물꼭대기 층은 학생이 규칙을 어겼을 때 가두었다고도 한다. 대학 감옥이 있다는 말은 타르투에서 대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으로 생각한다. 바로 옆으로 대학 본관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처럼 둥근 기둥이 전면을 떠받치고 있다. 타르투 대학교는 1632년 당시 스웨덴 국왕이었던 구스타프 2세가 설립한 것으로 북유럽과 발트 3국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학이라고 한다. 지금의 에스토니아 국기가 타르투 학생회가 사용하던 깃발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대학의 위상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할 수 있다.
대학의 설립자인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대학 본관 뒤의 언덕으로 올라가니 천사의 다리가 있다. ‘
천사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지만, 근처에 조성된 영국식 정원에서 이름이 붙여 영국식 다리로 불리다가 영국과 천사의 발음이 비슷하여 천사의 다리가 되었다고 한다.
천사의 다리에서 조금만 더 걸어 오르면 ‘악마의 다리’가 있다. 천사의 다리와 마찬가지로 악마의 다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천사의 다리와 마주 보고 있다는 위치 때문에 악마의 다리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에스토니아 대법원은 수도인 탈린이 아닌 타르투에 있다. 최고법원의 역할은 물론 헌법재판소의 역할도 맡고 있다. 교육부도 이곳 타르투에 있다.
이 언덕에서 가장 눈에 띄는 타르투 대성당으로 간다. 13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성당인데, 파괴되어 일부만 남아있다. 일부는 보수해서 대학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었다. 파괴되지 않았다면 꽤 웅장한 성당이었겠거니, 하고 생각해 본다. 성당 앞의 장식 돌이 인상적이다.
농노 출신으로 이 대학에 입학한 민속 시인 페디슨의 동상이 서있다. 지팡이를 든 모습은 그의 어머니가 리가에 살고 있어 타르투와 리가를 걸어서 오고 갔기 때문이란다.
민족 운동가 윌렘 레이먼의 동상도 있다. 타르투는 동상이 많기도 하다. 시가지로 내려와서는 벌거벗은 부자상, 모녀가 앉아있는 조형물도 있다. 그런 것들이 무미건조한 도시에 눈요깃거리를 만들어 주는 듯하다. 아주 오래된 장난감이 전시된 장난감 박물관을 지나며 타르투의 관광을 마치고 수도 탈린을 향하여 출발한다. 두 시간도 더 달려 드디어 탈린에 도착한다.
탈린은 11세기 덴마크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형성되었고 13세기 한자동맹의 중심도시가 되기도 했다. 고풍스러운 건물은 대부분 14세기에 지어졌다. 전쟁의 참화를 가장 적게 입어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통닭구이와 감자샐러드가 입에 맞게 나오는 저녁을 먹고 Susi 호텔에 체크인하고 50유로의 별도의 요금을 내고 탈린 시내 연장 투어를 나선다.
호텔에서 기다리던 현지 가이드 김수한을 따라 바닷가 가까운 해양 성문으로 구시가지에 진입하는데, 입구에 딱 버티고 있는 뚱뚱한 마가렛 성탑에 조명이 탁 켜진다. 뚱뚱한 마가렛 성탑은 16세기 초 톰페이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초기 성벽 옆에 세워진 성탑이다. 현재는 해양박물관으로 사용한다.
성탑을 빠져나와 거리에 들어서니 세자매 건물이 나온다. 바다로 들어온 상인들의 사무실과 창고로 이용된 세자매 건물 설명을 듣다 보니 비가 온다. 15세기에 건축된 이 건물들의 전면부는 모양과 높이가 비슷하다. 비를 맞으며 성 울라프 교회도 지나고 시청광장 주변에 있는 비어 하우스로 간다. 수제 맥주 맛이 좋긴 한데 홀 안이 시끄러워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하고 밖으로 나와 자유 광장으로 이동한다. 조명으로 하얗게 빛나는 십자가 모양의 독립기념비, 세인트 폴 교회, 우크라이나와 에스토니아의 대형 국기를 펼쳐놓은 건물을 지나 호텔로 이동하기 위해 트램을 타보는 경험은 참 좋다. 세 도시를 다니면서 시내를 누비는 트렘을 보면서 타고 싶었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나?
■ 제7일(8월24일. 일)
탈린에서 보내는 하루
아침 일찍 인솔자 오선영으로부터 카톡이 온다. 귀국편 비행기 웹 체크인 시간에 맞추어 좌석을 예약했단다. 폴란드와의 1시간 시차를 미처 생각하질 못해 새벽 3시 10분부터 밤잠을 설치며 고생했다는 그녀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매일 카톡으로 다음 날의 날씨와 일정을 챙겨주는 최고의 가이드인 것 같다.
탈린의 아침도 쌀랑하고 청결한 느낌으로 시작된다. 백조의 호수라 불리는 곳에서 하차하여 카드리오르그 여름 궁전으로 가는 가로수길은 운치가 있어 걷기에 좋다.
카드리오르그 궁전과 정원은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가 에카테리나를 위해 여름 궁전으로 지었다. 1718년에 짓기 시작하였다. 바로크식 궁전은 붉은색의 2층 건물로 양쪽으로는 단층 건물이 한 채씩 지어져 균형을 이루고 있다. 궁전 앞에는 넓은 정원이 자리 잡고 있고 분수대를 중심으로 키 작은 예쁜 여름꽃들이 잘 정돈되어 피어있다.
버스를 타고 구시가지로 이동한다.
구시가지는 톰페이라 불리는 고지대와 시청사가 있는 저지대로 나뉜다. 먼저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톰페이는 가장 높은 곳이라는 의미로 당시 지배층이 거주한 곳이다. 1922년에 지은 분홍빛 국회의사당이 있고 길 건너 바로 앞에 1,900년에 완공한 네프스키 대성당이 있다. 지붕이 검은색으로 특이한데, 모스크바에 있는 것과 모습이 거의 흡사하다.
크루즈를 타고 왔다는 관광객들이 길을 꽉 메우다시피 한다. 우리도 그 일행들과 섞여 길을 누벼본다. 건물벽에 얼굴과 손목이 튀어나온 현판이 눈에 띈다.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펼쳐 든 현판의 주인공은 20세기 초반 탈린 주립 음악학교의 공연예술 부서를 이끈 배우이자, 연극교사이고 감독이던 볼데마르 판소이다. 이 건물은 국립연극학교이다.
13세기에 세워진 루터교회, 외교관저를 지나니 파트쿨리 전망대가 나온다. 구시가지 전경이 발트해와 함께 한눈에 들어온다. 많은 인파를 제치고 그 이쁜 모습을 담기 위해 벽 쪽으로 마구 다가간다. 주변의 상가들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피의 거리’라 불리는 골목은 하도 좁아서 옛날 폭 넓은 드레스를 입은 귀족 여성이 지나가다 골목에서 마주치게 되면 상대방에게 서로 비키라고 입씨름하다가 격해져서 양 가문의 자존심을 건 기 싸움으로 번져, 피를 부르는 큰 싸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 연유로 피의 거리가 됐다고 벽에 걸린 사각진 간판에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전망대인 코투오차 전망대로 가보니 또 다른 각도로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 성 니콜라스 교회가 보이고 돔 교회가 보이고 높은 첨탑을 지닌 건물들이 여러 개 보인다. 붉은 지붕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역동적인 멋스러움을 연출한다.
높은 지역에서 낮은 지역으로 가기 위해 롱다리 길옆 숏다리길을 걸어 나오니 13세기에 지어진 어부와 선원의 수호신인 성 니콜라스 교회도 나오고 시청사 광장도 나온다. 광장 가운데 앉아 쉴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빙 둘러 음식점들도 있고 공연할 수 있는 공간도 제법 넓다. 광장을 돌아 나오니 중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중세 식당이 묵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심지어 조명도 촛불로 할 정도로 중세를 기억한다는 곳이다.
길드 건물들, 각종 가게를 지나 비루문에 이른다. 구시가지에 들어서는 또 하나의 관문인 이곳은 원뿔 지붕을 하고 원기둥 모양으로 두 개가 양쪽에 의연하게 서있다. 바로 앞에 비루백화점 등 신시가지가 보인다. 입담 좋은 김수환 가이드와 함께한 오전 일정을 마치고 차로 이동, 호텔에 가서 점심식사 후 다시 우리를 비루문 근처에 내려준다. 호텔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저녁까지 자유시간이다.
일행이 많을수록 자유시간을 멋지게 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님을 실감한다. 그래도 광장에 앉아 공연도 보고 등 뒤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느긋하게 한가함도 가져본다. 안 가본 길을 가보자고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보기도 하고 자유 광장으로 갔다.
자유기념비 앞에 대형 우크나이나 국기를 앞에 두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4개국을 여행하면서 자국의 국기보다 우크나이나 국기를 더 많이 본 것 같다.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러시아와의 질긴 악연을 엿볼 수 있었다.
광장 근처 피자집에 앉아 담소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약속 시간에 맞게 차로 가보니 한 명도 지각하지 않고 다들 잘 왔다. 우리의 자세가 성숙한 건지 이번 단체가 우수한 건지, 하여간 눈에 거슬리는 일 없이 여행이 끝나가고 있어 퍽 다행이다.
■ 제8일(8월25일. 월)
귀국길(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출발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거쳐 인천공항으로 가다)
꿈같은 7일이 후다닥 가버렸다. 새벽 6시부터 도시락을 받아 아침 요기를 하고 ‘레나트 메리 탈린공항’으로 이동한다. 이곳 탈린공항도 바르샤바 쇼팽 공항처럼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다. 폴란드 독립운동가이며 2대 대통령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란다. 공항 내에 그의 동상이 아주 크게 서 있다.
아주 유능하고 멋졌던 빅토르 기사와 헤어지고 출국 절차를 밟는데 부산에서 왔다는 일행 자매가 어머니 부음 소식을 듣고 오열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여행 끄트머리에서 이런 일이 있어 고인의 딸을 향한 마음이 전해지기도 한다. 가신 분의 명복을 빌어본다.
바르샤바까지 1시간 40분, 핸드폰에서 사진을 USB에 담다 보니 벌써 도착이다.
인천행은 대여섯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무료하기도 하고 컵라면을 먹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비교적 지연 없이 이륙한 비행기는 혹시나 했지만 역시 나로 기내식이 훌륭하다. 여하튼 무사히 인천공항에 드디어 도착한다.
9일간 같이했던 일행과 아주 우수했던 인솔자 오선영과 인사를 나눈 뒤 7박 9일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북유럽 발트해 연안국가까지 갔다 왔다는 포만감은 우리의 삶에 또 하나의 장식으로 깊게 새겨질 것이다.
다음 여행지는 독일 일주를 생각해본다. 가능하다면 참좋은 여행 오선영 인솔가이드와 함께하기를 희망하면서